2001년부터 2006년까지 문예지를 통해 발표되었던 박완서의 단편소설들을 묶어서 나온 책이다.
확실히 관록있는 작가여서 그런지 가볍게 읽혀지는 단편들이지만 읽고나서 남는 여운은 상당하다.


그립다는 느낌은 축복이다. 그동안 아무것도 그리워하지 않았다. 그릴 것이 없이 살았음으로 내 마음이 얼마나 메말랐는지도 느끼지 못했다. 우리 아이들은 내년 여름에 이모님이 시집간 섬으로 피서를 자가고 지금부터 벼르지만 난 안 가고 싶다. 나의 그리움을 위해. 그 대신 택배로 동생이 분홍빛 도미를 부쳐올 날을 기다리고 있겠다. 40p [그리움을 위하여]

남이 쳐다보고 부러워하지 않는 비단옷과 보석이 무의미하듯이 남이 샘 내지 않는 애인은 있으나마나 하지 않을까. 그가 멋있어 보일수록 나도 예뻐지고 싶었다. 나는 내 몸에 물이 오르는 걸 느꼈다. 67p [그 남자네 집]

그 여자는 가슴이 쿵쾅대는 소리가 들릴 만큼 숨을 죽이고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인기척을 내기에는 이미 늦어버리기도 했지만 그들의 목소리에서는 맛있는 걸 저희들끼리만 휘딱 먹어치워버리려는 다급하고도 게걸스러운 식욕 같은 게 느껴졌다. 전혀 상관없는 사람 얘기를 하고 있다고 해도 끝까지 듣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스캔들의 주인공이 자신이 될 것을 알아차혔다면 그전에 중턱을 잘랐어야 하는 것을…. 때를 놓치고 나서 떠오른 생각이었다. 82p

모든 인간관계 혹엔 위선이 불가피하게 개입하게 돼 있어. 꼭 필요한 윤활유야. 107p

그 여자는 그 소박하고도 느글느글한 것들을 짐승 같은 식욕으로 먹어치우고 인삼차를 한잔더 시켰다. 금년부터 치수를 28로 늘려 입었는데도 바지 허리는 만복을 이기지 못해 짤룩하게 뱃살과 허릿살을 갈라놓고 있었다. 명치가 등에 붙을 듯이 날씬하다가도 생명만 잉태했다 하면 보름달처럼 둥글게 부풀어오르던 배는 이제 두꺼운 비계층으로 낙타 등처럼 확실한 두개의 구릉을 이루고 있었다. 허리의 후크를 풀자 역겨운 트림이 올라왔다. 자신이 비곗덩어리에 불과한 것처럼 느껴지면서 메마른 설움이 복받쳤다. 108p [마흔아홉 살]

나는 마누라를 아끼고 사랑하며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다가 누가 먼저 저승에 가면 거기서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 세상 뜨고 싶다. 왠지 요새 자꾸 그런 소원이 절실해진다. 187p

“앞집 선생님이요? 들어오셨는데. 방금 전에 저희 집으로 파한 뿌리 얻으러 오신 걸요.”
마누라도 알건 알아야 한다. 하나 나처럼 충격적으로 알게 하고 싶진 않다.
우리도 젊은이들처럼 무드 한번 잡아봅시다. 이러면서 온 집안의 전깃불을 다 끄고 소년 소녀가 마주 보고 생긋 웃는 형상의 아름다운 한 쌍의 양초로 식탁을 장식한다면 알아들을까.
마누라에게는 알아듣는 것보다 받아들이기가 더 어려울 것이다. 196p [촛불 밝힌 식탁]

“유서는 어떤 사람이 쓰는데?”
“그 따위 건 저승에 가서도 이승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은 욕심을 못버리는 사람이 쓰는 거 아닌가?” 231p [대범한 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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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iddie's  |  2008/02/26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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